대학원에 다닐 때, 마지막 1년에 들었던 타 과의 글쓰기 수업이 있는 날을 참 좋아했다.
테이블을 ㄷ자로 만들어 놓아 강의실의 가운데가 텅 비어 있음으로써 10명 가량의 사람이 서로를 마주볼 수 있었던 그 수업에서 언제나 나는 출입문 가장 가까이, 관찰자의 자리에 앉았다. 늘 저 쪽 멀찍이 앉아있었던 시간이 지나 몇 명은 매우 성공적으로 등단을 하고, 그 글들이 시간이 지나 사람들의 원성을 사거나, 그들의 글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사라지기도 했다. 또 몇 명과는 북페어처럼 예견할 수 없는 어떤 장소에서 우연히 마주치고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그 분들이 과제마다 쓰고 공유했던 글들, 함께 나누었던 작은 이야깃거리들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어느 날은 그 강의에서 다뤄졌던 책 중 하나인 저명한 문학 시리즈의 번역가 선생님께서 특강을 오셨다.
긴 머리와 형형한 눈. 예순의 중반을 넘어가는 여성분으로, 쉽게 웃음이 번지지 않는 표정들이 인상적이었다.
그 분의 특강을 앞두고 문학시리즈를 급히 시작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여겨져, 학교 도서관에서 그 분이 번역하신 다른 단행본을 대여해 읽으며 특강날을 기다렸더랬다.
타과 학생으로서 못따라가는 것도 너무 많았어서 힘겨워하며 문학에 대한 말들을 들으며 강연시간이 지나갔고, 결국 내가 읽은 책과 번역중이신 시리즈를 연결하는 질문을 드리지는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만 왠지 그 책들을 읽지 않고는 그 분의 문학에 대한 헌신 앞에 도전할 자신이 나지 않았음.
강연을 마치고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그 분의 번역본들 책을 가져가 추억으로 남길 싸인을 받으려고 줄을 섰다.
내가 가진 것은 도서관에서 빌린 책 뿐이었고, 순간 마음속에서 '이 학교에서 열린 어느 수업안에 이 책의 번역가가 다녀와 학생들과 만나고 생각을 나누었다.'라고 작게 남겨둔 기록을 누군가 발견하면 멋지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일어났고, 나도 조심스레 줄을 섰다.
"저는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지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 책에 싸인을 받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잠시간 그 분은 고민하셨고, 도서관에 공공재로 소속된 책인데 망가트리는 것 같아 시원치 않은 마음이 든다고 말씀하시며 엄숙한 얼굴로 서명을 남겨주셨다.
책에 서명이 되는 순간 그 분을 난처한 선택에 끌어들인 것 같아 죄송하기도, 수치스럽기도 하고 무튼 매우 복잡한 감정들을 느꼈는데, 그게 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나는 어떤 기록을 남기고, 그것을 내가 갖지 않는 방식으로 소유하고, 그걸 공유하고 싶었던 걸까.
나는 마치 죄를 지은 애처럼 새 책을 사서 내야할까 앞장을 티안나게 찢어야할까 몇 일 고민하다가 그 책 그대로 반납했다.
표지를 넘기면 번역가의 서명이 있는 그 책은 아직도 학교 도서관에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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